Project Description
평론
기억의 수사학
-신경희 전시에 부쳐
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신경희는 30대 때인 1990년대의 한국 미술계에서 괄목할 활동을 보였던 ‘스타 작가’였다. 재료 기법에 대한 집요한 탐구, 회화 판화 입체 설치를 아우르는 탈(脫)장르의 형식, 내밀한 자신의 기억을 보편의 내용으로 확장하는 서사성 등 완성도 높은 자기 세계를 천착해 나간 작가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40여 점을 선별했다.
신경희는 1990년대에 〈화해할 수 없는 난제들(Irreconcilable Difficulties)〉 시리즈로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기억의 저장고’에서 불러낸 다양한 이야기를 오늘의 삶에 넌지시 맞대는 그림이다. 미국 유학 시절의 이국 체험이 자기정체성에의 투사로 연결됐다. 작가는 그림일기, 땅 따먹기와 같은 작은 이야기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나와 타자의 문제로까지 내용을 확장한다. 무엇보다 그 내용을 구상과 추상, 이미지와 기호가 반복 나열되는 다중구조로 펼쳐냈다. 특히 수제종이를 손바느질로 이어 짠 〈퀼트(Quilt)〉는 섬세한 감성과 동시대적 조형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신경희 특유의 ‘기억의 건축학’을 만날 수 있다. 2000년대에는 〈잠자는 도시(Sleeping City)〉와 〈정원 도시(Garden City)〉 시리즈로 이어졌다. 〈잠자는 도시〉는 기존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병치 나열의 구성을 견지하면서, 서울 근교의 작업실을 오가며 마주하는 자연과 도시 풍경을 추상화한 작품이다. 이후 〈정원 도시〉로 이행했다. 대작 중심의 회화에 몰입해 꽃이나 식물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점과 선으로 환원시킨 작품이다. 점과 선의 미세한 입자는 미시(micro)와 거시(macro)의 세계를 닮았다. 작가는 자연의 영원한 순환의 진리를 〈정원 도시〉라는 공간에 담고자 했다. 그 마음은 자연에서 출발해 현대 문명과의 상호 교합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이번 전시는 50대 초에 불행한 생을 마감했던 신경희의 뜨거운 예술혼을 다시 불러내는 자리다.
작가 소개
신경희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 타일러 스쿨 오브 아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제3미술관에서 판화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재학시절부터 동아미술제와 한국현대판화공모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는 등 판화로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에서 귀국한 1993년 대림화랑에서 회화 설치 판화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국내 화단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1994년 화랑미술제(인화랑)에 참가해, 한 일간지가 선정한 ‘차세대 베스트 10’에 선정되었으며, 그해 가을 39세 이하 작가에게 수여하는 공산미술제(동아갤러리 주최)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모색 ‘94》전에 초대되었다. 1995년에는 인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6년에는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 전시 작가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왕성한 작품 활동은 1997년 35세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석남미술상 수상의 영예로 이어져, 박여숙화랑에서 수상기념전을 열었다. 신경희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일약 화단의 ‘신인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1999년에는 미국의 모교 탬플대학교가 매년 선정하는 ‘가장 성공한 졸업생’에 올랐다. 신경희는 1997년 한국/호주 문화교류 아시아링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환기미술관과 호주 컨템포러리 포토그래피 센터의 교류전에 한국대표로 멜버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0년, 2003년에 인화랑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7년에는 펜실베니아 Langman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신경희는 모교 서울대와 탬플대 외에 성신여대, 계원예술대 등에 출강했으며, 2005년부터는 오직 작품에만 전념했다. 2010년부터 병마에 시달리다 2017년에 세상을 떠났다. 신경희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한솔문화재단, 성곡미술문화재단, 한미은행, 삼성중공업, 도서출판박영사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