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고영일, 영혼의 풍경

 

고영일은 ‘사람과 풍경’을 다루고 있다. 화면에 무엇을 그렸는지 대체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견고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다. 하이퍼리얼리즘에서 보이는 치밀한 묘사력이나 자연주의적인 묘사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고영일의 이미지는 사물의 정보를 자세히 전달하기보다 정밀묘사가 놓치기 쉬운 심상의 정(情) 등의 어떤 정서를 담으려 한다. 뚜렷한 형상 없이 색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풍경> 시리즈는 화면이 더욱 추상화되어 사물의 배열이나 선후 관계 등의 질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지가 이렇게 듬성듬성한 방식으로 놓이거나 색면의 중첩과 무질서한 배치로 이루어진 풍경은 세상과 만나며 만들어진 심상과 정서로 가득하다. 방식만 놓고 본다면, 고영일의 작업은 방법적으로는 추상의 모색이며 그 내용면에서는 감각의 접경들, 세상과 작가가 만난 제3의 감성지대를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동시대의 작품 동향은 설치나 영상작업이 매우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전통적인 장르로서 회화작품을 앞에 두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간단한 평면에 작가의 고민과 방법을 담아낸다는 것은 첨단시대에도 여전히 경이로운 일이다. 회화 자체의 오랜 전통과 생명력이 놀랍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한 복판에서도 그림이 깊은 정서의 굴곡을 담아낸다는 사실이 여전히, 아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그러한 정서가 어떤 방식으로든 객관화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고영일의 작업도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것 같지만 화면 곳곳에는 주관성으로 돌아 갈 수 없게 하는 회화적인 장치를 배치해두었다. 말하자면 그림을 구성하는 여러 장면이 작가가 처음 본 풍경이나 기억속의 풍경, 어떤 사람에 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작가만의 것으로 귀속되지 않도록 만드는 회화적인 장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라비아 숫자의 기입이나 단편적인 단어나 알파벳 등.

 

우리나라에서 추상의 모색은 ‘신사실파(1947-1953)’에서 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신사실파는 1947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3인이 결성한 미술동인 그룹이다. ‘신사실파’는 서로간의 친분이나 동문 등의 관계로 모인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조형 이념을 중심으로 결성된 그룹이며, 이들의 방법이 바로 추상의 모색이다. 추상의 목표는 그림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성을 화면에 구축하는 것이다. 이 고유성이 ‘새로운 사실’이라고 이야기되는 ‘신사실’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추상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회화적 사실’이라는 객관적 사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현대미술은 이렇게 이미지를 생략해가는 추상의 모색으로 이해되면서 조형적 사실 혹은 화면의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구축하는 것이다.

 

아마도 1940년대 말 추상표현주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그러한 작풍이 우리나라의 여러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시대의 양식으로 받아들여 진 듯하다. 1957년 ‘모던아트협회’라는 단체의 결성과 그 내용을 보면, 추상의 모색이 현대미술이나 당대의 바로미터가 되는 가장 최신의 방식으로 이해된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후 곧 기하추상이든 색면추상이든, 사물의 표면적인 정보를 넘어서서 그 본질을 표현하려고 하거나, 색이나 선이라는 조형의 요소가 화면의 주인공이 되어 주도적으로 화면을 구축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영일의 화면을 이끌고 가는 추상의 모색이 어떤 측면에서 작가의 주관성에 머물지 않고 ‘신사실’과 같은 객관적인 어떤 것, 말하자면 회화적인 어떤 것을 추구한 것일까? 화면을 둘러보자.

 

고영일의 화면은 미완성처럼 보이는 흘림이나 번짐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이미지나 거친 붓질을 중첩시켜 배열한다. 묘사의 명료함을 흐리면서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생략적으로 담아내는 추상화(抽象化)는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이자 원리이다. 이와 동시에 거의 모든 화면에는 숫자나 알파벳 일부가 보인다. 숫자나 알파벳은 화면을 더욱 추상화시키면서도 객관적인 면모를 갖추게 한다. 보다 미술사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숫자나 알파벳은 환영의 요소를 제거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매우 개념적인 면모를 갖추게 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20세기 초 도시의 현실을 명증하게 제시하기 위해 신문의 알파벳 일부나 숫자를 그림의 일부로 꼴라주했던 사례가 있다.

 

정리해보면 감각적으로 펼친 색면이나 색 덩어리, 계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선(線), 우연적으로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 형상을 알 수 없는 색면의 겹침, 이러한 양상들 사이사이에 전개된 아라비아 숫자들이나 알파벳은 정서적으로 충만한 화면을 다소 건조하게 만들어주면서 우연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화면을 정돈해준다. 예를 들어, <다리(a leg)>는 작품의 제목에서 지시하는 이미지가 바로 화면에 등장하지만, 그 다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물감의 번짐이나 흘림 속에서 엉거주춤 흔들리고 있다. 다리를 만들다 만 물감이 흘러내린 채, 다리 이미지와 이미지 주변에서 흔들리는 색 사이에 아라비아 숫자들이 한 개 두 개 박혀있다. 건조하고 추상적인 숫자와 함께 한 우연적인 색의 흐름이나 감각적인 붓터치 등은 추상의 모색이라는 작가 작품의 방법을 한 층 더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고영일의 ‘정신의 풍경’은 생각하면 할수록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상과 만나 형성된 심상의 일부가 화면의 ‘새로운 사실’로 대응되면서 고영일의 풍경화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재현으로서, 그 재현물에 상응하는 고영일의 정서 컨테이너는 주관과 객관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회화적인 진실로서 화면에 그대로 구축되는 것이다. 향후, 작가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더욱 더 밀고 나갈 것을 권하고 싶다.